여수 옆에 거문도가 고향이야. 10남매였는데 친정이 가난하다보니 식모살이를 하게 될까봐 내가 우리 남편과 일찍 결혼을 했어. 우리 아저씨와 콩깍지가 껴서 연애 결혼을 했지.
우리 시누나가 염천교 옆에 있던 수산시장에서 낙지를 팔았었어. 그러다가 염천교 시장을 없애고 노량진에 새로 수산시장을 짓는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우리도 따라가서 같이 낙지를 팔게 되었지. 50년이 지났다. 우리 상인들이 거의 다 노량진에서 4-50년 정도는 장사를 한 사람들이야.
낙지, 생굴, 생새우, 문어, 해물탕, 해파리를 팔았어. 처음에 장사를 하는 것은 무척 힘들었지. 말도 못한다. 자식들 먹여키우느라 눈 밭에서 넘어지기도 하며 힘들게 장사했다. 엄청나게 추웠다. 연탄 한장을 500원 내고 받아다 피웠다. 수도도 없어서 공동 수도에 가서 물도 직접 길어다가 썼다. 그래도 장사가 잘되어서 여수에서 빈손지고 올라왔지만 애들도 다 키우고, 가게도 커지고, 빚도 없는 것에 만족했어. 요즘 장사는 전기도 있고, 수도도 있고, 난로도 있으니 아무 것도 아니야.
- 처음에 수산시장 현대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어떤 기분이셨어요?
우리는 모두 오래 된 사람들이다. 이 수산시장이 개통식을 할 때부터 있었던 사람들이다. 나이도 많고 그냥 그대로 있고 싶었다. 상인들이 대부분 현대화를 원하지 않았다. 현대화를 시도한 시장들이 다 망한 것을 알고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협에서 일부 상인회 간부들을 접대도 하고 꼬드겨서 결국 우리들에게 합의도장을 찍게 했다.
- 투쟁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으세요?
우리들이 막겠다고 모여있는데 용역깡패들이 쓰레기장에서 쓰레기를 가져다가 우리들 위에 쏟았다. 연탄가루고 진물이고 온갖 더러운 것들이 얼굴이고 어디고 다 묻었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자식에게도 이런 일은 말 못해. 일평생 가슴에 묻고 있다. 빈손지고 가는 인생인데 수협이 우리에게 그렇게 모진 짓을 했는 지 이해하기 어려워. 좋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고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안왔을텐데 용역깡패들을 동원해서 상인들을 모욕하고 결국 알몸으로 쫓아냈어. |